지난번에 꼴로 후기 첫 편을 쓰면서 그 당시 힘들었던 감정이 너무 생생히 떠올라 바로 이어 쓸 수가 없었다. 사실 한편으로 끝낼 생각이었는데 생각보다 분량이 길어진 데다가, 그 불쾌했던 기분으로 또 두 번째 에피소드까지 한 번에 쓰려니 도저히 쓸 기분이 들지 않았다.
푸아티에에서 좋은 기억들이 많다는 걸 부정하려는 건 아니지만 스스로 어느 정도 그 시기를 미화하고 있었던 건 맞았나 보다. 암튼 마침 오늘은 학교 수업도 없고, 그냥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나머지 에피소드를 털어내고 빨리 끝내려 한다.
1편에서 적었던 대로 집주인과 마찰이 있었던 동시에 내 옆방에 사는 한 여학생과도 갈등이 있었는데, 이건 정말 떠올리기도 싫어서, 그 일이 있기 전에는 나름 친하게 지냈던 그 아이의 이름조차도 잊어버렸다. 내가 나중에 개빡쳐서 붙어준 별명인 세미X(세네갈 미친X)만 기억날 뿐이다. 별명으로 알 수 있듯이, 세네갈에서 온 친구다.
꼴로를 하려고 한 이유가 급하게 머무를 곳을 구하기 위해 최선의 방법이라 선택한 것이긴 했으나, 한편으로는 같이 사는 학생들과의 교류를 내심 기대했던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이웃들이 다 공부 때문에 바빠서 죽을 직전의 대학생들이라 친해지기는 커녕 부엌에서 얼굴 마주치는 것도 손에 꼽았다는 점이다. 세미와 프랑스 남학생 한 명, 여학생 두 명 빼면 나머진 일 년 동안 살면서 얼굴조차 보지 못했다. 나한테 소개해 주고 남았던 5번 방까지 차였는 걸 보면 분명 이 집에는 다섯 명이 살고 있는 게 확실한데... 아무튼 그랬다.
세미와 친해진 건 세미가 나에게 먼저 다가왔기 때문이다. K-Drama 우리 엄마가 너무 좋아해^^ 한국 음식도 맛있더라! 라면서 고마울 정도로 친근하게 말을 붙여주었고, 나도 굳이 무시하거나 거부할 이유는 없었기에 친해졌다. 같이 각자 나라 음식을 요리해서 나누어먹기도 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세미가 나를 함부로 대한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갑자기 와서 미안하다는 기색도 없이 현금 좀 빌려달라고 하거나, (없다고 하면 기분 나쁜 티 팍팍, 한숨을 푹푹 쉬면서 '진짜 없어? 찾아보지도 않는구나'라면서 돌아간다.) 한밤중에 문을 두드려서 열어주면 아묻따 들어와서 울다가(???) '정말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따위의 소리를 지르면서 자기 방으로 뛰어 돌아가기도 했다. 본인 기분 나쁜 일이 있어서 위로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 같기는 한데, 그러면 나한테 설명을 좀 해주던가... 평화로운 밤을 보내려고 하는 중에 다짜고짜 방에 쳐들어와서 갑자기 울지를 않나, 혼자 소리 지르면서 뛰쳐나가지를 않나, 황당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의 내가 세미를 만났다면 바로 '아, 저 아이 제정신이 아닌 편이구나. 쟤랑 엮이면 안 되겠구나' 하면서 멀리 했겠지만 그때의 나는 그렇게 까지 정신 나간 사람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생소했다. 그냥 '쟤도 나처럼 멀리 외국 와서 공부하니 힘들겠지.. 에휴' 하면서 그냥 그런 갑다... 했다. (왜 그랬어.. 왜 그랬어... 그냥 무시했어야지...)
그러다가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또 내 방문을 두드려서 열어줬더니 뛸 듯이 기뻐하면서 '나 이번 주말에 파리에 가서 가족들이랑 만날 거야!'라고 자랑하는 게 아닌가. 부럽기도 하고, 또 떨어져 있던 가족들과 만나게 돼서 기뻐한다는 게 충분히 공감이 가서 나도 축하해주었다. 문제는 여기서 세미가 나에게 내 캐리어를 빌려달라고 한 거다. 파리에 가려면 짐을 챙겨야 되는데 큰 캐리어가 없다면서 세상 불쌍한 척을 했다. 그 당시에 내 상식에서는 '친구가 빌려달라고 함=빌려줌/ 혹시 문제가 있더라고 한국에선 그럴 경우에 친구가 미안하다고 하면서 변상하거나 똑같은 거 사줌. 나도 그렇게 살았음' 이 기본이었고, 당연히 세미도 그런 친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선뜻 내 제일 큰 캐리어를 빌려주었다. 짐 싸는데 나랑 놀아주라~라고 해서 세미 방에 가서 같이 수다 떨면서 가져갈 옷도 골라주었다. 그렇게 세미는 파리로 가족들을 보러 내 캐리어를 가지고 떠났다.
며칠 뒤 세미가 돌아와서 내 캐리어를 돌려줬는데, 세상에 나는 튼튼한 캐리어가 그렇게 걸레짝이 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큰 딸내미 외국 나간다고 부모님이 좋은 캐리어로 사주신 건데, 사방에 흠집이 나있었고 바퀴고 망가졌는지 덜컹거렸다.
너무 놀라서 어버버 거리고 있는데 세미가 먼저 선수를 쳤다. 'ㅠㅠ나 기차역에서 굴러 떨어져서 캐리어도 이렇게 되고 내 다리 봐봐 나 접질렸어 병원 가야 돼ㅠ'라고 하면서 절뚝거리며 세상 불쌍한 척을 했다. 망가진 물건은 나중에 해결하면 되는 거고, 다쳤다고 눈물까지 그렁그렁한 애한테 물건값 타령하기엔 좀 미안해서 일단 병원 먼저 가고 이 캐리어 문제는 나중에 해결하자고 했다.
그렇게 세미를 방으로 돌려보내고 캐리어를 살펴보는데, 상태가 가관이었다. 손잡이는 중간에 끼어서 빠지질 않았고, 열어보니 캐리어 구석에는 큰 구멍이 뻥 뚫려있었다. 캐리어를 산에서 굴려도 이렇게 될 것 같지는 않은데, 도대체 어떻게 한 건지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렇게 까지 망가졌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고,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도 없이 캐리어를 건네준 세미에게 화가 났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세미는 캐리어에 대해서 한마디도 꺼내지 않았고, 결국 내가 먼저 이 문제를 꺼냈다. 다친 건 안타깝고 빨라 낫기를 바라지만, 캐리어는 나에게 중요한 물건인데 망가졌으니 변상을 하거나 똑같은 걸로 사달라고 문자를 보냈다.
그랬더니 바로 노크 소리가 들렸고 (아 진짜 내 문 두드리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제정신이 아닌가 보다) 세미가 정색을 하면서 '나 이렇게 다쳤는데 넌 네 물건 이야기하는 거야? 너 내 친구잖아'라는 개소리를 했다. 그래서 '이미 파리에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고 다리도 다 나은 거 아니냐, 너도 나같이 외국에서 온 학생이라 잘 알겠지만 캐리어는 나한테 중요한 물건이다. 난 꼭 변상받거나, 아니면 네가 같은 크기의 캐리어를 사와라'라고 했다. 그랬더니 기분 나쁜 티를 팍팍 내면서 계단을 쿵쿵거리면서 내려갔다.
그러다가 잠시 후에 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열어주었는데, 세미가 어디선가 사온 캐리어를 휙 밀어주었다. 그런데ㅋㅋㅋㅋㅋㅋㅋㅋ캐리어가ㅋㅋㅋㅋㅋㅋㅋㅋ아니 난 이렇게 작고 앙증맞은 캐리어는 처음 봤다... 아니 내 거 수화물로 붙이는 대형 캐리어였는데???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지도 찔렸는지, 아니면 나한테 무섭게 보여서 상황을 끝내고 싶었던 건지 친구까지 끌고 왔다.
다행히 이때 판단을 잘한 게, 나는 '이게 지금 같은 캐리어라고 사 온 거야? 크기가 정말 다르잖아. 나는 이거 절대 못 받아. 환불하면 되겠네'하면서 받지 않고 돌려준 것이다. 아마 그때 받았으면 어떻게든 자기가 사준 거 받았다고 우기면서 문제가 해결됐다고 했을 것이다. 세미는 '아니 이거 환불 안돼. 나 돈 없어 이게 최선이야.'라고 했고... 나는 거기에 '너 캐리어 없으니까 네가 쓰면 되겠네^^'라고 응수했다.
세미는 자기 친구와 함께 나를 노려보면서 그 작디작은 캐리어를 끌고 자기 방으로 돌아갔다.
이쯤 되니 나도 정신을 차렸다. 아 저 아이 제정신이 아니구나. 내가 미친 사람한테 내 소중한 물건을 빌려주는 실수를 저질렀구나... 싶었다. 꼴을 보아하니 다시 제대로 된 캐리어를 사 올 것 같지는 않았고, 그래서 그냥 돈으로 돌려받기로 했다. 원래 캐리어 값에서 중고인걸 감안해서 금액을 낮춰도 적어도 200유로는 받아야 했다. 캐리어 가격이 적힌 인터넷 사이트랑 금액을 메시지로 보냈다. 그랬더니 '나 지금 월말이라 돈 없고 이렇게 큰돈은 한 번에 못내...'라고 또 불쌍한 척을 하길래 내가 반씩 나눠서 내라고 했고 세미도 동의했다. (자기 집이 신발가게라 돈 많다면서 자랑하던 건 뭐지???)
그리고 그다음부터 거의 5개월 동안, 이 문제로 지독하게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어쩌다 부엌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기분 나쁜 티를 내면서 무시하기 일 수였고 (근데 그건 나도 상관없었다. 네가 잘못한 건데 기분 나쁘던가 말던가) 매번 다른 핑계를 대면서 돈 주는 것을 미뤘다.
매번 불쌍한 척하면서 Je te jure(나 맹세해)따위의 말을 쓰면서 철석같이 약속해 놓고서는 약속일이 가까워지면 이중인격자처럼 태도를 싹 바꾸는 게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이제 나도 별로 세미를 존중해주고 싶지 않아 졌고,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고 나도 똑같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행동하기로 했다. 사실 이 시점에서 나도 여러 가지 스트레스까지 겹치면서 정신줄을 좀 놓고 지내긴 했었다. 정말로 한국에 가서 정신적 휴식을 좀 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었다.
그래서 나도 수시로 돈에 미친 사람처럼 돈 내놓으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어느 정도 효과가 있기는 했는지 100유로를 겨우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런데 방을 빼고 한국에 돌아갈 날이 가까워졌는데도 계속 돈이 없다는 변명만 하면서 (월말이라 돈 없어ㅠㅠ월초? 울 엄마가 돈 많이 안 줘ㅠㅠ) 나머지 돈을 주지 않는 것이다... 비행기 날짜를 맞춰야 했던 나는 남은 100유로를 뜯어내지 못한 채 한국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한국 언니한테 세미 번호를 주고 계속 내가 보내는 문자를 전해달라고 했다. 세미가 한 번은 언니한테 돈을 주겠다고 만나자는 약속을 잡았지만, 그것도 바람 맞혔고, 결론은 그 백유로는 끝내 돌려받지 못했다. 이일과 관련 없는 언니가 대신 내 말도 전해주고, 약속까지 잡아서 대신 돈을 받아주려고 했는데도 세미 때문에 그렇게 된 거니 더 부탁하기도 미안했다. 부모님도 내 이야기를 듣고 (프랑스에 있을 때 이 새끼 때문에 너무 괴로워서 엄마한테 울면서 전화까지 했었다. 엄마가 해준 긍정적인 말들 덕분에 좀 제정신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냥 '혼자서 이상한 애 상대하면서 절반 돈이라도 받은 게 어디냐, 너 이야기 들어보니 너도 할 수 있는 만큼 했다. 그냥 인생 공부했다고 생각해라' 라면서 위로해주셨다.
그래서 이 시점에서 '돈이라도 못 받는 거 괴롭게라도 하자' 싶어서 아마도..? 자세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언니를 통해서 협박 메시지를 보냈던 것 같다. '이 문제 때문에 난 몇 개월 동안 힘들었다.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다. 너는 예의 없는 거짓말쟁이다. (이렇게 쓴 이유는 한 번은 내가 돈을 재촉하면서 너 왜 맨날 거짓말해?라고 했더니 그 거짓말이라는 워딩에 발작한 적이 있어서... 맨날 그렇게 살아서 엄청 찔렸나 보다ㅎㅎ) 너 프랑스에 아시아인들 많은 거 알지? 내가 니 얼굴이랑 이름 아시아 커뮤니티에 다 올릴 거다. 너 거짓말쟁이라고 소문낼 거다.'라고 보냈던가.. 아니면 그럴까 생각만 하다가 안 보냈다... 했을 거다. 지금 심정으로는 보냈다고 믿고 싶다. 하여튼 그렇게 세미와의 악연은 끝이 났다.
여름방학이 끝나고는 혹시라도 길에서 마주칠까 눈에 불을 켜고 다녔는데 (돈 받을 생각은 이미 없고, 마주치면 "거짓말쟁이!!! 거짓말쟁이!!! 빚쟁이!!!!"라고 소리치고 쫓아가면서 개쪽 주려고...) 정말 안타깝게도 단 한 번도 마주칠 수 없었다. 당연하지만 내 번호도 차단했더라.
세미 미친놈이야... 내가 아직도 저주하고 있다... 영문과라면서 영어로 대화하자고 하니까 영어 못한다고 하면서 자기 유리하게 불어로만 말하려고 한 게 아직도 기억난다. 아니 영문과라며???
진짜 휴대폰 포맷을 중간에 하는 바람에 세미와 주고받았던 문자까지 날아간 게 아쉽다.
그래도 이제 이 글을 끝으로 푸아티에에서의 악몽 같았던 시기는 묻어두고 좋았던 일들, 친절했던 사람들만 기억하려고 한다. 저당 시에 어학원에 같은 반 애들 중에 이상한 애들도 있었고, 기숙사 이웃들도 다 이상했고, 인종차별에 언어 시험에 입시 준비까지 정말 힘든 시기였지만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있어서 버틸 수 있었고, 그런 환경 때문에 꼭 학교에 들어가서 뿌띠 탈출하려고 더 열심히 공부했었다. 뿌띠에서 나빴던 기억 이제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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